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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은 작가의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 책이 도끼라면 이 책은 도끼다. 라는 말에 대해서

우와우앙 2021.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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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 홍승은 , 제목 :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 출판사 : 낮은산 출간연도 :2020 페이지 : 336p


책이 도끼라면 이 책은 도끼다. 라는 말에 대해서

홍승은 작가의 ≪두 명의 애인과 함께 삽니다.≫ 

 

내가 가입한 독서모임에 한달은 최소 한번 참석하자는 마음가짐을 먹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4개의 독서모임, 그리고 (문학, 역사모임까지 하면 결과적으론 6개 모임인가?)에 가입했다. 이 중, 북N피플 독서모임의 2021년 첫 책이 폴리아모리에 대한 에세이 책인, '두 명의 애인과 함께 삽니다.'이다. 새해 첫 책은 사랑에 관한 것인가? 여기 독서모임은 책을 매월 회원 추천도서로 선정되다보니 다루는 카테고리들이 다양하다. 그래서 편향되지 않게 골고루 책을 읽게 되는 모임인 것 같다. 뭐 각설하고 나는 이 책을 읽기로 마음먹었다.

이번 책은 내가 투표했던 책이 아니었다. 독서모임에 가입하면 사소한 단점이 있는데 읽기로 마음먹은 이 책을 사야 할까 말아야 할까 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책을 검색해 보는걸 먼저 했다. 한 줄 리뷰에 이런 글이 올라와있었다. 책은 도끼다. 기존 관념과 사고의 틀을 깨거나 확장해 줄 때, 그게 책이라면. 이 책은 도끼다.라는 말이었다. 클로버 4점 만점의 4점에 점잖게 써준 리뷰지만 나는 이 책을 사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이유는 내 책꽂이에 이 책을 꽂을 자리가 아직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읽기 전, 


두 명의 애인과 함께 삽니다. 나는 이 책 제목을 읽었을 때 제목에 새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텍스트에 불과했다. [두 명]에 초첨을 두었기보다는 [애인]에 초첨을 두었다. 애인과 함께 사는 사람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앞서 언급했다싶이 '사랑에 관한 책이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나서 '이 책이 도끼가 됐던 이유가 무엇일까?'를 찾다 [2명] 들어왔다.

 

나는 책, 영화, 드라마를 볼때마다 씬 마다의 감정에 충실한 편이다. 그래서 작가가 만든 슬픈 장면에는 울고 기쁜 장면에 웃는다. 하지만 관계망에는 무심한 편인 것 같다. 이건 나뿐만이 아니다. 역사나 과거의 이야기, 또는 좀 위대하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인 것 같다. (예를 들면 이순신 장군은 우리나라를 구한 영웅이지만 적군(인간)을 수십죽였다. 장군은 영웅이지만 적군도 일단 사람이다. 사람을 한 명이라도 죽이면 살인자다.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전쟁영웅은 살인자가 아닌가. 또한 세종대왕은 우리나라의 가장 위대한 왕중 한 명이다. 하지만 왕비 한 명, 후궁 8명이 있었다. 부인만 9이다. 하지만 누가 이 부분에 대해 부정하고 비난하는가..? 혹시나 오해할까 봐 글을 적어보자면, 세종대왕님과 이순신 장군님은 우리나라 위인 중 내가 존경하는 1,2위 분들이다. ) 부계사회에서 여러 명의 부인을 두는 것, 더 과거로 돌아가 모계사회, 유목사회에서의 부부의 개념이 없다거나 남편을 여러 부는 등의 가족상 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매체들을 통해서 신의 내용에만 집중하지 인물의 구조와 관계에 무심하게 생각한다. 생각이 길어졌다. 그런데 왜 저 책은 도끼가 된 걸까?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같은 단어는 역사의 인물쯤 되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데 일반인이 [폴리아모리]라는 뜻 모를 단어로 표현했기 때문인가? 사람들은 반복되는 것을 언어로 만들어 낸다. 저 관계가 사회에 반복되면서 만들어진 단어를 접하는 입장에서는 새로운 관념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도끼라면 도끼겠다.

 

폴리아모리가 뭐지? 위키백과에따르면,


 

 

폴리아모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양다리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다리 (해부학)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폴리아모리(영어: Polyamory)는 비혼자 집단에서 동시에 여러 명의 성애 대

ko.wikipedia.org

 

책의 감상, 


책을 읽으며 느낀 감상이라, 대체로 놀랍지 않았다.이다. 작년 중순쯤이었나? 나는 이미 연예의 참견이라는 예능을 통해서 폴리아모리의 연애에 대해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저 연애가 충분히 새로운 개념이었지만 새롭지 않은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고 지금이고 다자연애에 대해 이야기하면 "한 번에 여러 명을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먼저다. 바람과 외도의 관점으로 저 사랑이 옳다 그르다가 아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숭고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나는 주는 사랑이 무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나에게도 내 가족에게도 분에 넘치는 사랑을 줘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주는(give) 사랑을 사랑 곱하기 2! 하고 두 명 모두에게 공평한 사랑을 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사랑을 나눠서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인데 두 가지의 사랑이 다른 걸까? 복잡하고 어려운 부분인 것 같다. 

 

책에서 승은은 전통적인 단일 사랑은 독점, 소유 개념의 사랑이며, 폴리아모리를 추구하는 이유가 비 독점적인 사랑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통적으로 한사람을 사랑하고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이 독점, 소유 개념의 사랑인가?라는 생각과 함께 사랑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만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잘 읽혔다. 조금 불편한건가? 싶은 생각이 드는 건 내 주위에서 보지 못했었기 때문일 거다. 불쾌하지 않았던 건 내가 타인의 사랑까지 관여 할 필요가 있나?라는 무심함 때문일 거다. 그래서 작가의 저술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특이한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자신들도 평범한 사람들 중 하나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노력이 무던히도 보인다. 

어떤 말이나 행동, 사건들이 반복되고, 사람들이 그 반복을 의식하는 순간 반복되는 것들은 단어가 된다고 생각한다. 폴리아모리도 비슷한게 아닐까? 다만 반복을 많이 보지 못했던 곳에서는 불편하고 더러는 불쾌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뭐랄까 도음이 될지 모르겠지만.

프랑스와즈 사강의 "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말처럼 저 사랑이 나에게 어떤 피해를 주는 게 아니므로 존중한다. 하지만 이해는 잘 안 되는 수준에 남겨두기로 했다. 모르는걸 어땠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승은의 전통적 가정상에 대한 비판'에 대해


승인이 폴리아모리를 추구하는 것을 설명할 때마다 비독점적 사랑을 말한다. 전통적인 가정상이 한명의 남자, 한 명의 여자라면 이 둘은 소유와 독점의 관계로 바라봐야 한다는 걸까? 승인의 v형 연애가 승인-지민, 승인-우주라는 2개의 사랑의 관계가 아닌가? (셋이 이 관계를 인정하고 셋이 살게 되면서 지민-우주의 관계도 분명 있겠지만) 승은 1, 승은 2로 승은이 2명이라면 저 연애가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1:1 관계가 독점이라면 승인만 교집합처럼 있는 거지 둘 다 1:1 집합이 아닌가? 처음부터 표현을 이상하게 받아들인 걸까?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다자간의 연애도 1:1 관계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것..

 

이렇게 생각해도 저렇게 생각해도 외도와의 차이점이 무었이지? 상대방의 수용여부에 따라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건 용납할 수 있는건가?

 

 

승은이 주장하는 폴리아모리 생활의 모순이 무엇인가?


26p ~

 

우주와 연애하는 도중에 지민에게 끌렸고 지민과 만나다가 우주에게 고백한다. 이미 둘은 승은에게 빠진 상태에서 말하는 것.. 이게 바로 최악의 폴리아모리스트가 아니던가..? 이게 다자간 연애에서 폴리아모리에 가까운가 바람/외도에 가까운가. 두 단어가 묘하게 다른 어감이지만 결국 바람/외도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을까?

 

이미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상대방이 이 관계를 이해해주면 우리는 계속 만날 수 있어. 이해해지 못하면 정리할께. 또는 헤어지자.라는 것이 얼마나 상대에게 폭력적인가. 우주도 지민도 스스로 상처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폴리아모리의 정의를 잘 모르는 나도 , 승은이 시작한 연애가 폴리아모리가 아니라 바람에 가까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세명이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기로 결론남에 따라 스스로가 자신들의 상황에 맞는 비혼+자녀출산의도 없음+다자연애 등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사랑의 단어들을 찾아낸게 아닐까? 그게 비독점적 관계 폴리아모리구나~! 하고..  

 

 

인간동물을 중심과 비인간동물이 더불어 가는 세상을 꿈꾸는 승은, 그녀가 꿈꾸는 세상은 가능할까요?


승은 주변 인물을 소개할 때 동물들을 빗대가면서 이야기했다. 그녀의 습관일까? 그녀의 주변 사람들을 익명으로써 보호하기 위함일까? 동물들로 소개하니 조금 친숙해 보이기도 했다. 다만 뒤편에 갈수록 인간동물 중심과 비인간 동물이 더불어 가는 세상.이라고 말을 하고 있는데 뭔가 말하고 싶던 것들이 점점 흐려지는 느낌이 든다. 말하고 싶은 게 너무 많지만 그녀도 잘 모르는 것 같은 느낌. 비혼, 애완동물, 장애인, 페미니스트, 트랜스젠더 등 현재 이슈가 되는 차별적 요소들이 나온다. 물론 자극적이거나 억지스럽지게 표현되지는 않는다. 그녀의 일상과 그녀의 생활 속 이야기 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뭔가 나는 약자야. 약자 중의 약자지. 네가 차별받는 그룹에 하나라도 맞는다면, 그리고 네가 다양성을 존중하고 편견과 차별을 하지 않는 것을 도덕적 가치로 두는 사람이라면 나를 이해할 거야. 같은 생각은 내 억지일까? 

 

 

 

우리 사회는 소수를 보듬어 주고 그들과 더불어 사는 방향으로 진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의 잡음도 무시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는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10분짜리 단편 영상 <대안수학>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도 있는데요, 권리와 책임이라는 문제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 어떤 모순점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답변하기 너무 어려운 주제고, 내가 이 질문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조차 모르겠다. 나의 능지수준이 정말 낮구나... 권리와 책임에 대해서는 그래서 할 말이 없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책과 나의 모순을 찾자면..

 

나는 "다양성이 보장되고 편견과 차별을 하지 않는 세상"을 올바른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런 기본적인 것을 어릴적부터 배워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은 다양성이 보장되지 않고, 편견과 차별이 만연히 일어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좌절을 하기도 하지만 종종 도덕적 가치관을 더 다잡아야 할 때도 있다.

 다만 경계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작년에 읽었던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책을 예로 들고 싶다. 나는 이 책을 읽을 때 느끼는 바가 매우 컸다. 나는 도덕적으로 선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타인들에게 의식적으로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상처를 주는 입장이라면? 나는 타인에 무심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 말과 눈빛과 태도에서 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장애인들은 장애인들의 극복을 다루는 이야기를 싫어한다. 역경을 이겨내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자신들이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편견을 만들게 한다는 것이다. 나 또한 저런 편견을 해오지 않았던가? 왜 책을 안읽지? 왜 노력하지 않지? 요즘은 경험이 편견이 되는 시대니 나의 경험이 뭐든 상처가 될 수 있는 시대다. 

 두번째 경계하고 싶은 부분은 [선량한 차별주의자],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 모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리는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이름에 취해서 다양성이 보장과 편견, 차별은 반대한다는 문구를 내세우며 세상의 모든 차별적 이슈들을 나열한다. 이 중 네가 하나라도 차별받는다면 어서 내 말에 동의해. 너의 차별도 다른 차별과 같은 상처야.  혹은 장애인을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영웅으로 만들고, 여성을 워킹맘, 걸 크러쉬, 비혼, 페미니스트 등으로 표현하는 등의 내용들을 직접적으로 나열해서 도덕적 개념을 강요할 수도 있고, 나는 페미 니스인데 성적 소수며, 애견을 키우고, 비혼주이자며, 딩크야. 약자는 보호해줘야지.라며 약자의 약자로 보이게 하여 비난을 피하거나 약자들에게 보호받기를 선택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너희들은 차별주의자야라는 도덕적 우위에 취해서 너를 교정할꺼야라는 부정적인 견해가 생각나기도 하다. 음.. 너무 부정적인가? 이런점은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의 권리와 책임을 논해야 하는 걸까?

 

난 대안수학 영상을 보면서 선량한 차별주의자와 1984가 생각났다. 언론과 정치 이런 것 모두를 고려해야 하는 걸까? 몇시간만으로 생각하기에는 부족한 주제다. 모르겠다.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또 잘 모르는 이야기를 주구장창 써내려가면서 헛소리를 할 것 같다. 

 

계속 서론만 길고 본론이 사라진다.

 

나는 위선자가 맞는 듯하다. 올바른 세상을 다양성이 보장되고 편견과 차별을 하지 않는 세상이라고 했다. 올바른 세상을 정의했지만 올바름을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 결국 이게 가장 큰 모순이 아닐까? 회피하기 위해서 모른다고 잡아때고, 정의를 내렸을 뿐이다.

 

이만하면 꽤 열심히 읽었다. 읽는 도중 부정적인 의견들이 많아서 부정적으로만 읽지 말고 각자의 사랑에대해서 생각하면서 읽어봐요~ 라고 말한게 오만이었구나 싶을 정도로 비판적인 내용이 많아졌다. 왜지..? 읽을때는 열린마음으로 읽었는데... 대답하다보니 순 비판의 글로 가득차버렸다.  

 

 

 

 

 

79p. 해석하려는 사람이 없으면 해석당하지 않는다. 판단하려는 사람이 없으면 판단되지 않는다. 폴리아모리랒는 말을 몰라도 그냥 셋이 사는구나 정도로 이해하는 것,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봐주는 것. 이정도면 되지 않을까?

 

128 폴리아모리관계는 어쩌면 소유보다 존재로 사랑하라는 에리히 프로금의 말을 잘 따를 수 있는 형태지만, 나는 여전히 존재로 사랑하라는 말을 체화하기 어려운 인간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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